홍성규

[1-63] 홍성규

광주 양동에 태어나 조선대 수료 예성에 건장한 탄력몸매로 은윤윤업에 이어 오솔길 음악실에 충장로 참으효자로 찬연 대의에 앞선 진한 풍운아여!! 그 보혈 온 겨레 생명력으로 영세하리라.

  • 안장장소 :국립5·18민주묘지
  • 묘역구분 :1묘역
  • 묘역번호 :1-63
  • 성      명 :홍성규
  • 출생년도 :1947-10-10
  • 사망일자 :1980-05-20
  • 이장일자 :1997-06-14
  • 직      업 :음악감상실 운영
  • 사망장소 :금남로(추정)
  • 사망원인 :타박상(두부 손상)
  • 내      용 :-충장로 효자
    효성 지극한 장남이자, 딸과 아들을 하나씩 둔 아버지였던 홍성규 씨는 충장로 1가에서 오솔길 음악감상실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그는 시국을 걱정하는 젊은이들을 자주 접할 수 있었던 덕분에 현 정세가 얼마나 불안한지 잘 알고 있었다. 1980년 5월, 계엄군이 광주에 몰아닥쳐 모든 대학들에 휴교령이 내려지는 바람에 오솔길을 드나들던 후배들과 홍성규 씨는 직접 시위에 가담할 수 있게 됐다. 그러던 5월 20일, 홍성규 씨는 늦은 점심을 먹고 집을 나섰다가 영영 집에 돌아가지 못하게 됐다. 시위의 선두에 섰다가 계엄군의 집압봉에 뒷머리가 깨지고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도록 얻어맞은 탓이었다. 급히 전대병원으로 옮겨져 수술 순서를 기다리던 홍성규 씨는 이틀을 버텼으나, 부족한 의료진과 의료시설로 인해 수술조차 받아보지 못하고 숨을 거두고 말았다.
    홍성규 씨가 돌아오지 않자 홍성규 씨의 아버지 홍기표 씨는 홍성규 씨의 아내와 함께 시내의 모든 병원을 뒤졌다. 그러나 수술을 위해 머리를 민 그를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23일이 돼서야 전대병원에서 홍성규 씨가 숨을 거뒀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병원으로가 시신을 수습했다. 일전에 갔던 병원이었으나 얼굴이 부어오르고 머리를 밀어버린 탓에 알아보지 못하고 지나쳤던 모양이었다.
    홍성규 씨의 시체는 추모식을 뒤에, 상무관으로 옮겨졌다가 선산에 안장됐다가 1983년에는 망월동으로 이장됐다. (증언자 : 홍기표)


    "증언자의 증언을 토대로 요약한 내용입니다. 실제 사건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도서 : "그해 오월 나는 살고 싶었다", 5·18민주유공자유족회 구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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