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열락

[1-61] 최열락

원망·분노·슬픔·5.22 울고 울고 이젠 지쳐버린 당신의 아내 오늘도 울고 당신 만날 날 기다리며 병준, 병찬 소중히 지키렵니다.

  • 안장장소 :국립5·18민주묘지
  • 묘역구분 :1묘역
  • 묘역번호 :1-61
  • 성      명 :최열락
  • 출생년도 :1953-07-25
  • 사망일자 :1980-05-22
  • 이장일자 :1997-05-04
  • 직      업 :운전
  • 사망장소 :광주교도소 부근
  • 사망원인 :총상(좌우흉부, 우둔부 관통)
  • 내      용 :-산산조각 난 신혼의 행복
    1977년 친척의 중매로 결혼한 최열락 씨는 두 아들과 아내와 함께 단란한 가정을 꾸려갔다. 가장으로서의 책임에 충실했던 최열락 씨는 1980년 5월 21일에도 출근을 했었으나, 퇴근길에 계림동에서 친구를 만나던 중 공수부대가 친구의 머리를 곤봉으로 때린 것에 놀라 일찍 집으로 귀가해 각목과 부엌칼을 들여놓고 잠을 잤다. 최열락 씨의 집이 시민군과 계엄군이 대치하던 경계지점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음날 22일, 최열락 씨는 이른 아침부터 집을 나섰다. 아내가 말렸으나 시민들이 너무 많이 다쳤다며 집을 나섰고,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아내 송귀숙 씨는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찾아 광주를 뒤졌으나, 찾을 수 없었다. 5월 28일 실종신고를 했으나 시댁 쪽에서 북으로 넘어간 이력이 있어 최열락 씨가 북한으로 넘어갔을 거라는 소리를 형사들에게서 들어야 했다. 송귀숙 씨는 그렇게라도 남편 최열락 씨가 살아있기를 바랐으나, 실종된 지 3개월 만에 광주교도소 인근 야산에 암매장 돼 있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됐다. 가매장 돼 있다는 망월동 묘역으로 간 송귀숙 씨는 당장 최열락 씨의 묘를 파헤쳐 얼굴이라도 보고 싶었지만, 주변의 만류 때문에 하지 못했다. 최열락 씨의 죽음 후, 송귀숙 씨는 정부요인들이 광주를 찾을 때마다 자택에 연금돼 있었고, 일상에서 형사들의 지속적인 감시를 받았다. 자식들을 키울 여력이 되지 않아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진정서를 제출했으나 젊으니까 열심히 벌어서 생활하라는 답변만 얻었었다. 후에 유족보상금을 받아 사업을 시작했으나 사업에 실패해 지금까지도 생활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증언자 : 송귀숙)


    "증언자의 증언을 토대로 요약한 내용입니다. 실제 사건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도서 : "그해 오월 나는 살고 싶었다", 5·18민주유공자유족회 구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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