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사천

[1-57] 조사천

세상 무수히도 많은 가르침의 말들도 아버지께서 말없이 온몸으로 보여주신 그 가르침만큼 위대하지는 못했습니다. 아버지! 잊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세상 모든 이들도 그 가르침을 새기며 살 수 있게 노력하겠습니다.

  • 안장장소 :국립5·18민주묘지
  • 묘역구분 :1묘역
  • 묘역번호 :1-57
  • 성      명 :조사천
  • 출생년도 :1946-08-08
  • 사망일자 :1980-05-21
  • 이장일자 :1997-05-09
  • 직      업 :건축업
  • 사망장소 :도청 앞
  • 사망원인 :총상(좌전흉부 맹관상)
  • 내      용 : -아버지의 영정사진
    조사천 씨는 전남대학교 후문 근처에서 건축업을 하고 있었다. 예정 되었던 공사가 며칠 뒤로 미뤄진 1980년 5월 18일, 비상계엄령이 확대되고 통행금지 시간이 앞당겨졌다. 평소보다 일찍 집으로 돌아간 조사천 씨는 아내 정동순 씨와 함께 처가에 가서 농사일을 돕고 20일, 집으로 돌아왔다. 조사천 씨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광주교육대학교 정문 앞에서 공수들에게 학생들이 구타당하는 것을 보고 그들을 뜯어말리다가 공수들에게 맞고 말았다. 이 일에 대한 분노로 조사천 씨는 시위에 참여하게 됐다. 21일에는 인부들과 함께 집에서 점심을 먹고 밖으로 나가, 계림초등학교 뒤쪽에서 시민들이 몰고 다니던 트럭에 올라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도청 앞에서 계엄군이 쏜 총을 맞았다. 학생들이 급히 기독교병원에 옮겼으나 손쓸 겨를도 없이 세상을 뜨고 말았다.
    조사천 씨가 총에 맞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내 정동순 씨는 그와 함께 나갔던 일행에게서 그가 총에 맞았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러나 어디 병원으로 옮겨졌는지 몰라 가까운 개인병원을 뒤졌으나 남편을 찾지 못했다. 다음날이 돼서야 남편을 찾았고, 구묘역에 안장됐다. 다섯 살에 상주가 된 아들 조천호 씨는 매년 5월마다 매스컴에 시달리다가 1998년 6월부터 5·18 묘지에서 일 하며, 광주의 5월이 잊혀가는 걸 안타까워하고 있다. (증언자 : 정동순)



    "증언자의 증언을 토대로 요약한 내용입니다. 실제 사건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도서 : "그해 오월 나는 살고 싶었다", 5·18민주유공자유족회 구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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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감사합니다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조정선 2017-08-04 23:3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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