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균수

[1-47] 임균수

동방의 명의를 꿈꾸며 원광대학교 한의대본과 2학년 재학 중 조국의 민주화에 기여한 그대여! 오오! 애 재라. 그 인물! 불생불멸의 진리를 깨달아 원력을 크게 깨우소서!

  • 안장장소 :국립5·18민주묘지
  • 묘역구분 :1묘역
  • 묘역번호 :1-47
  • 성      명 :임균수
  • 출생년도 :1959-08-25
  • 사망일자 :1980-05-21
  • 이장일자 :1997-05-05
  • 직      업 :대학생(원광대 한의대 본과 2학년)
  • 사망장소 :도청 앞
  • 사망원인 :총상(두대골절, 하악골 골절)
  • 내      용 :-민주애국학생 임균수
    1980년, 유신체제에 반대하는 집회가 매일같이 열렸다. 학생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가 시위를 했고, 임균수 씨는 학내에서 열리는 집회에 빠지지 않고 나가던 깨어있는 학생이었다. 1980년 5월 17일, 가족들을 만나기 위해 광주로 내려 온 임균수 씨는 전국으로 확대된 계엄령과, 휴교령 때문에 광주에 며칠 더 머물게 됐다. 임균수 씨는 18일, 19일을 집에서 부모님과 함께 보냈다. 그러나 20일, 부모님이 관등행사로 집을 비우자 다음날인 21일, 형 임양수 씨에게 전화를 걸어 함께 도청 앞으로 갔을 때, 총성이 울렸다. 도청 앞에서 협상결과를 기다리던 시민을 향해 군이 무차별 사격을 시작한 것이었다. 놀란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달아나기 시작했고, 인파에 밀려 두 형제는 헤어지고 말았다. 임양수 씨는 집으로 가 동생을 기다렸으나, 임균수 씨는 그만 전일빌딩 옥상에서 날아 온 총에 맞고 말았다.
    임양수 씨는 늦게까지 임균수 씨가 집으로 돌아오지 않자, 친구들과 도청 부근을 샅샅이 뒤졌다. 그러다 22일, 기독교병원 영안실에서 임균수 씨를 발견했고, 이 사실을 부모님에게는 알릴 방도가 없어 누나에게라도 알리려했으나, 누나를 만나러 가는 길에 계엄군에게 잡혀 알리지 못했다. 임양수 씨는 두 달이나 고문을 받았고, 때문에 동생 임균수 씨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하고 말았다. 그가 나왔을 때, 동생은 이미 안장된 후였다.
    한편, 등불행사에 참여했던 부모님은 광주로 가는 교통이 모두 끊겨 시골집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러다 광주항쟁이 점점 심각해진다는 소식을 듣고 택시를 대절해서 광주로 향했다. 큰딸에게서 임균수 씨의 죽음과 임양수 씨의 실종 소식을 들었다. 임균수 씨의 장례를 임양수 씨가 오면 하자고 미루다가, 결국 임양수 씨가 오기 전에 망월동에 안장했다. 임균수 씨의 아버지는 민주항쟁으로 죽은 아들을 기리기 위해 장학금 사업을 하고 있으며, 자신의 사후에도 장학 사업이 계속 운영 될 수 있게 노력하고 계신다. (증언자 : 임병대)


    "증언자의 증언을 토대로 요약한 내용입니다. 실제 사건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도서 : "그해 오월 나는 살고 싶었다", 5·18민주유공자유족회 구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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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위에 참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윤지후 2019-06-04 12:08:10

  • 균수야! 현희다. 항상 미안함을 마음속으로 담고 살고 있구나 너와 함께했던 어렸을때, 초등, 중등, 고등시절의 16년 동안보다 이젠 만나지 못한 시간이 곱절이 넘었구나 오늘 무척 보고 싶어 이리 저리 뒤적이다 추모를 남길수있다해서 이름 불러 본다 균수야 조만간 얼굴없이 만나자. 현희가^^

    남현희 2018-05-23 20: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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