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인섭

[1-37] 양인섭

아버님, 고이 잠드소서! 두 살 여섯 살이던 우리 형제가 이젠 성인이 되었습니다. 남은 일들은 저희들이 하겠습니다. 부디 편히 잠드소서. -아들 주영·세영-

  • 안장장소 :국립5·18민주묘지
  • 묘역구분 :1묘역
  • 묘역번호 :1-37
  • 성      명 :양인섭
  • 출생년도 :1947-01-02
  • 사망일자 :1980-05-21
  • 이장일자 :1997-06-14
  • 직      업 :당구장 운영
  • 사망장소 :금남로 (추정)
  • 사망원인 :타박상(후두부 우측 함몰)
  • 내      용 :-남편의 몸값을 거부한다
    남달리 의협심이 강하던 양인섭 씨는 광주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고만 있을 순 없었다. 거리에서 벌어지는 일은 양인섭 씨가 다녀온 베트남전보다 더 참혹했다. 거리에서 쓰러지는 동생 혹은 누이 같은 젊은이들 외침이 그를 시위대로 이끌었다. 아내 손창순 씨가 말렸지만 양인섭 씨는 듣지 않았다. 그가 운영하던 당구장은 문을 닫은 상태였기 때문에 특별히 문제 될 일은 없었다. 5월 21일, 양인섭 씨는 집을 나섰다.
    그리고 늦은 저녁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손창순 씨는 어린 두 아들을 두고 양인섭 씨를 찾아다녔다. 흔적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다음날, 친정 작은어머니의 도청에 죽은 사람들을 모아놓는 다는 이야기를 듣고 도청으로 가봤다. 없길 바랐지만, 도청 지하실에 이마에 총구멍이 난 채로 누워있었다. 시댁시구들은 선산에 양인섭 씨의 장지를 마련하자고 했지만, 손창순 씨는 가까운 망월동에 남편을 묻었다. 그리고 유족회에서 재무 일을 맡아 진상규명에 힘썼다. 그러자 매일같이 형사들이 찾아와 일거수일투족을 감시 했다. 1986년과 1990년에는 말도 안 되는 방식으로 지원금을 지급했다. 남편의 목숨값이라고 생각하니 언짢고 불쾌해서 받기를 거부했다.
    손창순 씨는 정부가 바뀌면 조금 달라질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아직도 바뀐 것은 없다. (증언자 : 손창순)


    "증언자의 증언을 토대로 요약한 내용입니다. 실제 사건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도서 : "그해 오월 나는 살고 싶었다", 5·18민주유공자유족회 구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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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람의 목숨은 돈의로 살수 없습니다.

    조지성 2019-06-04 13:45:04

  • 목숨값이라니너무하내요

    김명문 2019-05-31 09:54:48

  • 광주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도 있으셨을 텐데 나서서 참여한 모습이 정말 아름답고 본받고 싶어요 이렇게 많은 훌륭하신 분들이 목숨을 잃으셔서 안타까워요

    정다인 2019-05-21 20:18:03

  • 두아들과 부인을 뒤로하고 나서기가 쉬운 일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양인섭님은 광주에서 일어난 일이 화가나 누구보다 빠르시게 나서셨잖아요.이때 저는 의협심이 강하신 양인섭님의 모습을 본받고 싶었어요. 그리고 목숨과 바꿔 어이없는 지원금을 지급해주려고고 할때 정말 목숨이 무슨 물건인가 지급해주려 했던 분들도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지금 남아계신 부인 손창순님와 아들 두분 쓰라린 가슴을 제가 제대로 위로해드릴 수 없어 죄송하기만 하네요.

    박성은 2018-05-25 20:5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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