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병복

[1-35] 안병복

자전거를 타고 도청 쪽을 향해 가는데 도청옥상에서 공수특전대 병사들이 M16 소총을 난사해 좌측 상 어깨로 하여 두부 골로 관통, 얼굴 한쪽과 어깨가 떨어질 정도로 돼있는데 여고생이 보고 태극기로 덮어 도청민원실로 여러 명과 옮김.

  • 안장장소 :국립5·18민주묘지
  • 묘역구분 :1묘역
  • 묘역번호 :1-35
  • 성      명 :안병복
  • 출생년도 :1960-01-01
  • 사망일자 :1980-05-21
  • 이장일자 :1997-06-14
  • 직      업 :재봉사
  • 사망장소 :미상
  • 사망원인 :차량사(두개골 완전 파열 및 좌상지 절단)
  • 내      용 :-견딜 수 없는 그리움
    80년 5월 18일 어머니 김금란 씨는 새벽, 광주에 계엄군이 왔다는 걸 모르고 설악산 여행길에 올랐다. 설악산에서부터 광주의 낌새가 이상하다는 소식을 듣고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가 광주까지 걸어서 올라갔다. 안병복 씨는 집에 없었고 가족들은 새벽에 자전거를 타고 나갔다는 것만 알 뿐, 그가 어디로 갔는지 알진 못했다. 23일부터 김금란 씨는 걸어 다니며 아들 안병복 씨를 찾았다. 경찰서와 병원을 모두 뒤졌지만 안병복 씨를 찾진 못했다. 그러던 25일, 군복무 중인 셋째아들에게 전화가 왔다. 신문 부고 란에 안병복 씨의 이름이 있다고 했다. 김금란 씨는 둘째 아들과 도청으로 달려가 안병복 씨의 시체를 확인했다. 머리가 으깨지고 한쪽 어깨마저 떨어져 나가 있었다. 목격자가 분명하지 않아 무엇을 하다 사고를 당했는지, 누구의 차에 치였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었다. 안병복 씨는 26일 상무관으로 옮겨졌다가 27일, 계엄군이 다시 광주로 진입한다는 소식 때문에 바로 묻지 못했다. 김금란 씨는 몸을 피했다가 안병복 씨를 망월동에 묻었다. 후에 신묘역으로 이장 된다.
    아들의 억울한 죽음 때문에 어머니와 아버지는 시위에 뛰어들었다. 아들 안병복 씨가 살아 돌아오는 대신 보상금을 받았지만, 보상금을 쉽게 쓰지 못한 김금란 씨는 여전히 가난하다. (증언자 : 김금란)


    "증언자의 증언을 토대로 요약한 내용입니다. 실제 사건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도서 : "그해 오월 나는 살고 싶었다", 5·18민주유공자유족회 구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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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김신영 2018-05-18 13:4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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