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월 21일
피 흘려 쓰러져가는 동지들을 구하려
기독교병원에서 헌혈하고 나오다가
무자비한 계엄군의 총탄에 맞아 사망함.
- 안장장소 :국립5·18민주묘지
- 묘역구분 :1묘역
- 묘역번호 :1-26
- 성 명 :박금희
- 출생년도 :1963-07-13
- 사망일자 :1980-05-21
- 이장일자 :1997-06-14
- 직 업 :고등학생 (전남여상-구 춘태여상 3학년)
- 사망장소 :지원동
- 사망원인 :총상(요부 및 복부)
- 내 용 :-열 여덟 살 꽃다운 금희의 죽음
매사에 적극적이고 솔선수범하던 박금희 씨는 4남 4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학교성적도 좋았고 선도반장도 도맡아 했으며, 친구들과 기타를 튕기며 노래를 부르기도 하는 낭만적인 사람이었다. 5월 21일, 오전부터 집안의 빨래와 청소를 모두 마친 박금희 씨는 어머니와 식사를 마친 후에 집을 나섰다. 그리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해 기독교병원에 가서 헌혈을 했다. 자신의 피가 누군가의 생명에 보탬이 될 거라는 사실에 행복하던 박금희 씨는 병원을 나서다가, 계엄군의 헬기에서 쏟아진 총탄에 맞고 즉사했다.
박금희 씨가 집에 돌아오지 않자 어머니 문귀덕 씨는 불안해졌다. 그래도 딸이 살아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셋째 딸네로 향하던 중에 박금희 씨의 학교 선생님들로부터 사망 소식을 들었다. 문귀덕 씨는 선생님들과 시민군의 차를 얻어 타고 기독교병원으로 향했다. 영안실로 향하면서도 딸이 아니길 빌었지만 아침에 차고 나간 오빠 시계를 보니 박금희 씨가 분명했다. 어머니 문귀덕 씨와 아버지 박병민 씨는 당장이라도 딸의 시체를 묻어주고 싶었지만 군인들이 박금희 씨를 죄인으로 취급하는 바람에 묻지 못했다. 박금희 씨의 시체는 도청에서 상무관으로 옮겨졌다가 아무런 통지도 없이, 뒤늦게 망월동에 묻혔다. (증언자 : 박병민, 문귀덕)
"증언자의 증언을 토대로 요약한 내용입니다. 실제 사건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도서 : "그해 오월 나는 살고 싶었다", 5·18민주유공자유족회 구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