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홍수

[1-25] 나홍수

그때의 외침으로 이 땅의 민주주의를 심어 놓으시고 오늘 우리들이 민주주의를 키워갈 때 그때의 외침은 참된 삶입니다.

  • 안장장소 :국립5·18민주묘지
  • 묘역구분 :1묘역
  • 묘역번호 :1-25
  • 성      명 :나홍수
  • 출생년도 :1947-03-15
  • 사망일자 :1980-05-21
  • 이장일자 :1997-05-09
  • 직      업 :목수
  • 사망장소 :도청 앞
  • 사망원인 :총상(우전흉부 관통)
  • 내      용 :- 불러보지 못한 이름
    월남전의 총알을 피해 돌아왔던 나홍수 씨는 1980년 5월 21일, 도청에서의 총알은 피하지 못했다. 나홍수 씨는 알뜰한 아내와 2남 1녀의 자녀를 슬하에 둔, 단란한 가족의 가장이자 목수였다. 그러나 5월 18일, 나홍수 씨는 목공일을 손에 잡을 수 없었다. 거리에서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21일, 집에만 있어 답답했던 나홍수 씨는 아내에게 시내구경을 가겠다고 말하고 동네사람들과 길을 나섰다. 도청 앞에 서 있다가 전일빌딩 위에 있던 저격수에게 오른쪽 가슴을 관통당했다. 사람들이 쓰러진 나홍수 씨를 전대병원으로 급히 옮겼지만 큰집의 전화번호만 남기고 사망하고 말았다.
    그의 아내 이금자 씨는 충격으로 쓰러졌지만 나홍수 씨의 죽음을 크게 알리지 않았다. 특히 부산에서 일을 하고 있던 동생에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당시 광주에서 있었던 일은 군부가 언론을 통제하고 왜곡, 축소된 사실들을 보도한 탓에 이경숙 씨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광주의 일을 알지 못했다. 언론에 의하면 광주에 빼곡했던 군인들은 사회혼란을 야기한 폭도들을 진압했을 뿐이었다. 광주의 상황을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때문에 이경숙 씨는 1980년이 다 가기 직전에야 나홍수 씨의 죽음과 광주의 참혹하 진상을 알게 됐다. 1985년, 이금자 씨의 병세가 깊어졌고, 이경숙 씨는 언니의 병간호와 조카들을 위해 광주로 왔다. 이금자 씨는 아이들을 돌봐줄 것을 동생에게 당부했고, 결혼도 하지 않았던 이경숙 씨는 언니와의 약속을 충실히 지켰다. (증언자 : 이경숙)


    "증언자의 증언을 토대로 요약한 내용입니다. 실제 사건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도서 : "그해 오월 나는 살고 싶었다", 5·18민주유공자유족회 구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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