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용아!
행여 올까 하는 기다림 속에서
너는 오지 않고 많은 세월이 흘렀다.
이제는 내가 너를 찾을 때가 되었구나.
-엄마가-
- 안장장소 :국립5·18민주묘지
- 묘역구분 :2묘역
- 묘역번호 :2-37
- 성 명 :박성용
- 출생년도 :1963-01-26
- 사망일자 :1980-05-27
- 이장일자 :1997-06-14
- 직 업 :고등학생(조대부고 3학년)
- 사망장소 :도청
- 사망원인 :총상(배흉부 맹관 총상, 우대퇴부 관통 총상)
- 내 용 :
-피지 못한 꽃송이
1980년 5월 당시, 박성용 씨는 고등학교 3학년이었다. 학동 파출소가 불타는 것을 본 박성용 씨는 분을 견디지 못했다. 공수부대가 함부로 사람을 보고 때리는 것 또한 견디지 못하고 시위에 참여했다. 어머니의 만류와 누나의 핀잔에도 하루종일 밖을 돌아다녔다. 그러던 26일, 박성용 씨는 자취하는 친구가 광주공원에서 총에 맞은 것 같아 걱정된다는 말을 남기고 집을 나섰다. 그리고 그 길로 도청에 들어가 부상자들과 시신이 가득한 도청에서 사상자들을 돌보는 일을 했다. 같이 일하던 대학생들이 위험하니 돌아가라고 박성용 씨를 타일렀지만, 박성용 씨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사상자들을 돌보다가 27일 새벽, 계엄군에 총에 맞아 숨을 거뒀다.
가족들은 박성용 씨가 죽었다곤 생각하지 못하고 며칠을 찾아 헤맸다. 그러다 열흘이 지났을 때쯤, 경찰인 박성용 씨의 작은아버지를 통해 박성용 씨의 죽음을 알게 됐다. 사진으로 확인된 박성용 씨는 망월동에 가매장 돼 있었다. 가족들은 망월동에 박성용 씨를 안장했다가 1997년 신묘역으로 이장했다. 어머니 김춘수 씨는 아들의 죽음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마음 아파하다가, 유족회를 통해 아들의 오명을 벗겨주고자 활동했다. (증언자 : 김춘수)
"증언자의 증언을 토대로 요약한 내용입니다. 실제 사건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도서 : "그해 오월 나는 살고 싶었다", 5·18민주유공자유족회 구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