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규

[2-36] 박병규

죽음을 앞두고 전화로 식구들을 안심시키던 네가 주검으로 돌아온 아침, 에미 가슴도 이 나라 정의도 무너지더냐. 17년 세월에 이제 너를 내 가슴에 볼 수 있게 했구나.

  • 안장장소 :국립5·18민주묘지
  • 묘역구분 :2묘역
  • 묘역번호 :2-36
  • 성      명 :박병규
  • 출생년도 :1961-05-04
  • 사망일자 :1980-05-27
  • 이장일자 :1997-05-05
  • 직      업 :대학생(동국대학교 1학년)
  • 사망장소 :도청
  • 사망원인 :총상(좌흉부 맹관 총상, 우슬관절 관통)
  • 내      용 :-5·18의 전국화
    형제들 중 가장 학업성적이 우수하던 박병규 씨는 책상 앞에 앉아 공부를 하다가도 뉴스 할 시간이 되면 꼬박꼬박 TV를 챙겨보던 청년이었다. 1980년, 박병규 씨가 동국대학교에 입학했을 때는 전국적으로 대학생들의 시위가 끊이지 않던 때였다. 비상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되고 광주에 계엄군이 들어서자 박병규 씨의 부모님은 이렇게 혼란스러운 시기에 홀로 자취하는 아들이 걱정 돼, 박병규 씨를 광주로 불러들였다. 5월 19일, 박병규 씨는 광주로 내려와 다음날부터 시내로 나가 친구들과 시위에 참여했다. 그러면서 집에 들어오지 않는 날이 늘더니, 계엄군을 광주에서 몰아내고 도청을 접수한 후에야 몇 번 집에 들어왔다. 그리곤 학생수습대책위원회에서 일할 때 본 것들을 말 하다 다시 도청으로 들어가곤 했다. 26일, 박병규 씨는 도청 상황실에서 계엄군이 다시 광주로 밀고 들어올 것을 알고서 마지막 총격전을 준비하고 있었으나 이 모든 것을 감추고 어머니에게 웃으며 안부 전화를 드렸다. 그리고 27일 새벽, 도청을 둘러싼 계엄군의 총탄에 맞아 숨을 거뒀다.
    가족들이 박병규 씨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상무관으로 갔을 때, 이미 그는 망월동 묘역으로 옮겨진 뒤였다. 망월동에 박병규 씨가 있다는 소리에 가족들은 부랴부랴 망월동으로 가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히고 새 관에 넣어 다시 입관 했다가 1997년 신묘역으로 이장 됐다. 아들의 죽음으로 마음의 병을 얻은 아버지는 금방 세상을 떠났고, 1983년 어머니는 같은 동네에 사는 김영배 씨 부인의 소개로 유족회 활동을 시작했다. 여동생 박경순 씨는 1984년 5·18 추모 행사에 참여했다가 정태영 씨와 함께 유족회 내의 청년회를 결성해 폭도라고 오명 쓴 억울한 죽음들을 위해 활동하기 시작했다. 어머니와 그의 동생 박경순 씨는 5월 항쟁이 3.1운동처럼, 4.19혁명처럼 사람들의 가슴에 자연스럽게 파고들 수 있는 그런 날이 오길 바라고 있다. (증언자 : 박경순)


    "증언자의 증언을 토대로 요약한 내용입니다. 실제 사건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도서 : "그해 오월 나는 살고 싶었다", 5·18민주유공자유족회 구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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