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용동

[2-33] 문용동

군의 투입 공수부대 개입. 터질 것이 터져버렸다. 반 기절한 시민을 업어다 병원에서 치료했다. 누가 이 시민에게 돌을 각목을 총기를 들게 했는가. 이 엄청난 시민들의 분노는 어떻게 배상해줄 것인가. 대열의 최전방에서 외치고 막고 자제시키던 내가 적색분자란 말인가……. 뭔가를 진정한 민주주의 승리를 보여 줘야한다. 역사의 심판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으리라. -문용동의 일기장 중에서-

  • 안장장소 :국립5·18민주묘지
  • 묘역구분 :2묘역
  • 묘역번호 :2-33
  • 성      명 :문용동
  • 출생년도 :1952-09-06
  • 사망일자 :1980-05-27
  • 이장일자 :1997-05-06
  • 직      업 :대학생(호남신학대 4학년)
  • 사망장소 :도청
  • 사망원인 :총상(우흉부 맹관 총상, 좌전흉부 맹관 총상)
  • 내      용 :-나도 불순분자란 말인가?
    8남매의 여섯째로 태어난 문용동 씨는 호남신학대학교에 다니며 신앙으로 하루하루를 살았다. 거리의 부랑자를 집으로 데려와 목욕을 시키고 밥을 먹여 따뜻하게 입혀 보내거나, 제일교회에서 운영하는 성격구락부 국어교사로 봉사하는 일, 상무대 교회에 파견돼 전도사로 봉사하기도 했다. 자신의 신앙에 충실했던 문용동 씨는 1980년 5월 18일, 목사님과 상무대 교회를 다녀오는 길에 시민들이 공수들의 몽둥이에 쓰러지고 목사님마저 공수부대들의 군홧발에 짓밟히는 것을 보고 시위에 참여하게 됐다. 매일 시위에 참여하다가 문용동 씨는 수습대책위원으로 무기관리를 하게 됐고, 도청 지하실에 있는 TNT 폭약과 수류탄 등을 관리했다. 집단 발포 이후, 시민들이 화순탄광과 지원동 석탄장 탄약고에서 다량의 TNT와 각 지역의 경찰서에서 총기류와 실탄, 수류탄 등을 탈취해 자체 무장을 강화한 것이었다. 그리고 22일, 계엄군이 광주를 빠져나간 이후부터는 무기를 회수하기 시작해 어마어마한 양의 무기들이 보관되고 있었다. 혹여 계엄군이 다시 들어온다면 이 무기들은 광주시민과 계엄군 모두에게 엄청난 피해를 줄 수 있는 양이었으므로, 문용동 씨는 동료 김영복과 의논해 폭약을 뇌관분리 해 관리했다. 전문가가 없어 상무대에서 군인 한 명이 와서 분리 하는 것을 도왔는데, 이 일이 진상규정 과정에서 문용동 씨가 일부러 폭약을 뇌관분리 해 계엄군이 도청을 쉽게 접수 할 수 있었던 거 아니냐는 오해를 사기도 했으나, 그도 도청에서 죽었으며 끝까지 무기고를 지켰다는 사실이 오해를 물리칠 수 있었다.
    협상이 결렬되고 계엄군이 27일 새벽, 다시 도청으로 밀고 들어왔을 때 문용동 씨는 조준 사격 돼 날아든 총탄에 가슴을 맞고 그 자리에서 숨을 거뒀다. 문용동 씨는 망월동에 묻혔다가 1997년 5월 6일, 신묘역으로 이장됐다.(증언자 : 문근재)


    "증언자의 증언을 토대로 요약한 내용입니다. 실제 사건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도서 : "그해 오월 나는 살고 싶었다", 5·18민주유공자유족회 구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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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지인으로 부터 들은 고인의 정신을 잊지 않겠습니다.

    조장환 2014-03-25 03: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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