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이가 우리 대학생을 다 죽인다고
집을 나와 시민군에 가입해서 죽을 때까지
싸워야 한다고 5월 18일 나가서
5월 27일까지 열심히 용감히 싸웠음.
- 안장장소 :국립5·18민주묘지
- 묘역구분 :2묘역
- 묘역번호 :2-32
- 성 명 :김종철
- 출생년도 :1962-03-06
- 사망일자 :1980-05-27
- 이장일자 :1997-06-14
- 직 업 :자개공
- 사망장소 :미상
- 사망원인 :자상, 타박상(흉복부자상, 두부타박)
- 내 용 :
-그해 5월이 앗아간 두 아들
집안 형편으로 초등학교만 졸업한 김종철 씨는 일찍부터 자개 기술을 배웠다. 그렇다고 부모님을 원망하진 않았다. 김종철 씨는 자개공장에 취직해, 공장기숙사에서 생활하며 꿈을 키워나가던 열여덟 노동자였다. 그러던 1980년 5월 19일, 월산동 파출소가 불탔고 양동에 살던 김종철 씨는 월산동에 사는 외삼촌네가 걱정돼 20일, 아버지 김영배 씨와 함께 외삼촌 댁에 들렀다가 충격적인 모습을 보게 됐다. 부상당한 학생들이 실려 나가고 있었다. 태극기 덮인 리어카에 실린 시체를 본 김종철 씨는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아버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 길로 시위대열에 참여했다. 그리고 27일 새벽, 도청을 떠나지 않고 지키던 김종철 씨는 계엄군의 총에 의해 세상을 떠났다.
가족들은 돌아오지 않는 김종철 씨를 찾아다녔다. 하루에 몇 번 씩 망월동에 들렸다. 어디에도 김종철 씨가 보이지 않자 답답한 마음에 어머니 이혜남 씨는 점쟁이들을 찾아가기도 했다. 그렇게 한 달이 다 돼갈 무렵, 망월동에서 시신들의 이름을 확인한다는 이야기가 들렸다. 5월에 연행된 80명을 석방한다는 소식도 들렸다. 그래서 가족들은 다시 망월동으로 갔고, 그곳에서 김종철 씨의 사진을 봤으나 아직 지문 조회 중이라 시신을 확인할 수 없으니 연락을 기다리라는 말과 함께 집으로 되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사흘 뒤에나 동사무소에서 연락이 왔고, 그제야 김종철 씨는 망월동 묘역에 안장될 수 있었다. (증언자 : 이혜남)
"증언자의 증언을 토대로 요약한 내용입니다. 실제 사건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도서 : "그해 오월 나는 살고 싶었다", 5·18민주유공자유족회 구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