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부열

[2-29] 김부열

가는 말이 없고 사는 이 고통과 번뇌로 만신창이가 되었네. 나 또한 지쳐 쉬고 싶노라.

  • 안장장소 :국립5·18민주묘지
  • 묘역구분 :2묘역
  • 묘역번호 :2-29
  • 성      명 :김부열
  • 출생년도 :1963-05-03
  • 사망일자 :1980-05-22
  • 이장일자 :1997-05-11
  • 직      업 :학생(조대부고 3학년)
  • 사망장소 :지원동(부엉산 추정)
  • 사망원인 :총상(흉부상부절단, 다발성 총상)
  • 내      용 :-투쟁 속에서만 어머니는 살아 있었다
    고등학교 3학년이던 김부열 씨는 1980년 5월 21일, 휴교령으로 학교에 가지 않고 집에 있었다. 어머니 김차남 씨가 절에 가는 걸 따라 함께 대문을 나선 뒤 친구네 집에 간다고 하며 행적을 감췄다. 집을 나선 뒤의 행적은 알 수 없고, 23일과 24일 사이에 계엄군의 총에 사살 당했다는 것만이 이후 봉쇄 작전의 임무를 인계받은 20사단 군인에 의해 밝혀졌다. 봉쇄작전은 광주시 외곽으로 철수한 계엄군들이 주요 도로를 차단하고 보이는 대로 양민들을 학살하기 시작한 것을 말한다. 7특전여단의 33, 35대대와 제11특전여단의 61, 62대대가 지원동 주남마을에 기지를 설치하고 광주-화순 간 도로를 차단한 후 봉쇄 작전을 펼쳤다. 김부열 씨는 이때, 주남마을 야산에 매복한 군인들을 추격하는 과정에서 총에 맞아 죽은 걸로 추정 된다.
    이런 사실을 모르고 아들을 찾아 헤매던 김차남 씨는 6월 12일 시청에서 연락을 받고, 김부열 씨가 매장되어 있다는 주남마을 뒷산으로 향했다. 김부열 씨의 시신은 심하게 조각나 있었고, 신원을 확인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끔찍하게 죽임을 당하고 20여일을 산중에 버려진 채로 보낸 김부열 씨는 망월동 묘역에 묻혔다. 그러나 총을 들고 무장시위에 참여한 탓에 폭도로 이름 지어져, 장례비와 5·18 유가족 위로금을 받을 수 없었다. 어린 자식을 끔찍한 폭력에 의해 잃은 김차남 씨는 유족회에 가입해 활동했지만, 그것으로 마음의 병을 치유 할 순 없었다. 그녀는 아직도 마음의 병을 앓으며 돌아오지 않을 어린 자식을 그리워하고 있다. (증언자 : 김차남)


    "증언자의 증언을 토대로 요약한 내용입니다. 실제 사건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도서 : "그해 오월 나는 살고 싶었다", 5·18민주유공자유족회 구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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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랑 이름이 같아요 ㄷ ㄷ

    김부열 2021-03-31 11:4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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