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병철

[2-21] 임병철

폭군의 피바람을 헤치고 이한 몸 역사에 바쳤다. 오월의 피는! 당신의 피는! 사람 사는 세상에 밑거름 이니 영원한 자유의 넋입니다.

  • 안장장소 :국립5·18민주묘지
  • 묘역구분 :2묘역
  • 묘역번호 :2-21
  • 성      명 :임병철
  • 출생년도 :1955-01-01
  • 사망일자 :1980-05-24
  • 이장일자 :1997-05-09
  • 직      업 :운전기사(남선연탄)
  • 사망장소 :송암동
  • 사망원인 :총상
  • 내      용 :-어느 연탄공장 운전기사의 죽음
    전남 곡성에서 6남매의 둘째로 태어난 임병철 씨는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홀어머니 슬하에서 어렵게 자랐다. 초등학교만 마치고 광주의 연탄공장에서 운전기사로 일했고, 1980년 5월 당시에는 결혼을 약속한 여자와 동거하고 있었다. 임병철 씨는 직장과 가까운 집에서 살고 있었는데, 인성고 앞에서 총격전으로 많은 군인이 죽었고 그것을 본 임병철 씨는 무섭고 놀란 마음에 어지간한 일엔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그러나 밖이든 안이든 안전한 곳은 없었다. 24일, 진압군들이 임병철 씨가 있던 집을 사격한 뒤, 안으로 들어가 젊은 사람 세 사람을 끌고 나왔다. 집에 있던 할머니가 이 세명은 데모꾼이 아니라고 항의했지만 소용없었다. 셋은 집에서 100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도로변에서 모두 총에 맞아 죽었다. 임병철 씨의 시체는 그의 동거녀와 형 임병원 씨의 아내, 그리고 큰동서가 리어카에 실어 상무관으로 옮겨졌다가 고향에 안장됐다가 후에 신묘역으로 이장 된다.
    형 임병원 씨는 동생의 죽음도 모른 채 영암에서 일하다가, 30일 잠시 광주에 들렀을 때 임병철 씨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됐다. 동생 얼굴을 한번 보게 해 달라고 상무관으로 향했지만, 군인들이 못 들어가게 하는 바람에 그대로 돌아서는 수밖에 없었다. 임병원 씨는 어머니와 함께 1981년 서울로 이사했다가 동생을 더 자주 챙겨주고 싶은 마음에 1995년 광주로 돌아왔으나 자꾸 그날의 기억이 떠올라서 쉽게 가지 못하고 있다. 어머니도 평소에는 임병철 씨를 만나러 오는 걸 힘들어하면서도 꼭 5월이 되면 광주를 찾는다. (증언자 : 임병원)


    "증언자의 증언을 토대로 요약한 내용입니다. 실제 사건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도서 : "그해 오월 나는 살고 싶었다", 5·18민주유공자유족회 구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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