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상원은 전남대학교 문리과대학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5·18항쟁지도부 대변인으로 활동 중
전남도청에서 장렬히 산화.
박기순은 전남대학교 사범대학
국사교육학과 재학 중
노동자 교육 운동 중 과로로 숨지다.
※ 윤개원님은‘윤상원’으로 개명했음
- 안장장소 :국립5·18민주묘지
- 묘역구분 :2묘역
- 묘역번호 :2-11
- 성 명 :윤개원(윤상원)
- 출생년도 :1950-08-19
- 사망일자 :1980-05-27
- 이장일자 :1997-05-08
- 직 업 :노동자,야학교사
- 사망장소 :도청 민원실 2층 회의실
- 사망원인 :자상, 화상 (하복부 자상 및 하악골 흉부 복부 등 화상)
- 내 용 :-님을 위한 행진곡
광산 임곡에서 3남3녀의 장남으로 태어난 윤상원 씨는 삼수 끝에 전남대학교 문리대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할 수 있었다. 윤상원 씨는 자신의 학비를 위해 전답을 팔아야 하는 가난한 부모를 생각하며 열심히 취업준비를 하고 번득한 직장에 들어가 동생들을 보살필 의무가 있었지만, 1975년 3월에 친구의 소개로 김상윤 씨를 만나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뜨게 됐다. 학내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잘 다니던 회사를 6개월 만에 그만 둔 뒤 다시 광주로 내려와 학력을 속이고 광천공단 내 한남플라스틱에 위장 취업했다. 윤상원 씨는 공장 노동자로 일하는 동시에 박기순 씨를 중심으로 결성한 들불야학에서 적극적으로 참여해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노동자들에게 일반사회 과목을 가르쳤다. 그러던 1979년 10월, 박정희가 암살당해 민주화의 봄이 열렸다고 믿었고, 서울의 이태복, 청년운동가들과 빈번한 접촉, 재야인사들을 만나며 전국 단위 비공개 반합법 노동운동단체의 결성을 모색했다. 윤상원 씨는 전국민주노동자연맹과 전국학생노동자연맹 두 조직에 가담했고, 1980년 5월 14일부터 16일 횃불시위까지, 그는 농성에 지속적으로 참여했다. 그러다 5월 17일 새벽, 전국으로 계엄령이 확대됐고 윤상원 씨는 적극적으로 항쟁에 참여했다.
윤상원 씨는 계엄군이 물러난 5월 21일에서 26일 사이, 민주수호범시민궐기대회를 개최하기 위해 대대적인 홍보활동을 시작했고, 23일부터 열린 궐기대회부터 26일 마지막 궐기대회 까지 총지휘를 맡았다. 그러던 5월 26일 저녁, 공수부대가 아침 일찍 도심으로 쳐들어올 것이라는 정보가 입수됐고, 윤상원 씨는 도청에 있던 300명의 시위대를 불러 모아 여자들과 아직 어린 아이들은 집에 돌아가길 권유했고, 돌아가서 광주항쟁을 잊지 말고 후세에도 계속 이 정신이 계속 이어지길 바랐다. 새벽 3시부터 계엄군 공수부대 특공대의 집중사격이 시작 됐고, 그들과 교전하던 과정에서 윤상원 씨를 다수의 시민군이 사망했다.
윤상원 씨의 시신은 28일, 다른 영령들과 망월동으로 옮겨졌고 관번호 57, 검안번호4-1, 묘지번호 111로 가매장 됐다. 가족들이 시체를 확인한 후 봉분했으며 1982년 3월, 윤상원 씨의 가족들이 그를 들불야학 동지인 박기순 씨와 영혼결혼식을 올려줬다. 윤상원 씨와 박기순 씨는 부부의 연을 맺고도 100미터나 떨어져 있다가, 1997년 신묘역 조성이 되면서 합장됐다. (증언자 : 윤석동)
"증언자의 증언을 토대로 요약한 내용입니다. 실제 사건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도서 : "그해 오월 나는 살고 싶었다", 5·18민주유공자유족회 구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