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남용

[1-11] 기남용

서기 1980년 5월21일 무등경기장 앞에서 차량 집결하여 공수부대에 대항하고자 도청으로 돌격. 전대병원에 안치.

  • 안장장소 :국립5·18민주묘지
  • 묘역구분 :1묘역
  • 묘역번호 :1-11
  • 성      명 :기남용
  • 출생년도 :1956-04-20
  • 사망일자 :1980-05-21
  • 이장일자 :1997-05-11
  • 직      업 :자영업(피복상)
  • 사망장소 :도청 앞
  • 사망원인 :좌흉부 피하출혈, 안면부 타박상
  • 내      용 :-당신이 자식을 잃어봤소?
    가난한 집안의 장남으로서 동생들을 위해 다니던 중학교를 중퇴한 기남용 씨는 성격이 괄괄하고 화끈한 편이라 친구도 많고, 어른들의 귀여움을 한몸에 받았다. 특히 이모부는 그를 후계자로 생각할 만큼 아껴, 피복일을 가르쳤다. 후에 기남용 씨는 장성에서 농사를 짓는 부모님 곁을 떠나, 이모부의 알선으로 광주 양동 상가에 가게를 얻어 피복상을 운영하게 됐다. 1980년 1월, 기남용 씨는 결혼 했는데, 일찍 얻은 아들을 보며 아내와 함께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그러나 비상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되고 계엄군이 광주에 입성한 5월 18일 이후, 그는 피복상 일보다 거리를 뛰어다니는데 많은 시간을 들였다. 이런 기남용 씨를 아내의 부모님과 이모부 모두 시위에 나가지 말렸고, 결국에 그는 아내와 아이를 데리고 장성으로 피난하게 됐다. 급하게 짐을 챙기다가 빼먹은 아기 기저귀를 마저 챙기기 위해 집으로 발길을 돌린 기남용 씨는 우연히 친구들을 만나게 됐고, 친구들과 함께 시위차량에 올라타고 말았다. 5월 21일 기남용 씨가 탄 트럭이 도청을 향해 달려갈 때, 총 소리가 들렸고 놀란 차가 급정거했고, 발목에 총상을 입은 채 조수석에 앉아 있는 기남용 씨가 거리에 내동댕이쳐졌고, 계엄군이 달려들어 차 안의 사람들을 거리로 끌어냈고, 가슴에 대검을 꽂았다. 그때, 기남용 씨의 가슴에도 대검이 꽂혔다. 그는 인제병원에서 전대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끝내 숨을 거두고 말았다.
    아버지 기충호 씨는 오지 않는 아들을 기다리다가 이모부의 전화로 아들의 죽음을 예감했다. 다음날 기충호 씨는 전대 병원에서 아들의 시신을 했고 장례 후, 망월동에 안치됐다. (증언자 : 기충호)


    "증언자의 증언을 토대로 요약한 내용입니다. 실제 사건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도서 : "그해 오월 나는 살고 싶었다", 5·18민주유공자유족회 구술)

당신이 자식을 잃어봤소?

추모글을 남겨주세요

5·18민주화운동의 숭고한 정신과 역사적 의의를 왜곡하려는 그 어떠한 글이나 정보는 예고없이 삭제하오니 이점 양지하시기 바라며,
경우에 따라서는 법적인 책임도 물을 수 있음을 고지하는 바입니다.

댓글등록
추모글은 100자 이내로 작성해 주세요.현재 0자 (최대 100자)
:
:
추모글 입력

: 아래 새로고침을 클릭해 주세요. 새로고침

  • 지금의 저희가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신희애 2018-05-18 13:44:51

  • 대검....욕만 나오네요..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세이라 2018-05-14 09:30:43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