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자유와 민주화를 위하여 촛불처럼
제 몸을 태우는 사랑과 희생을 몸소
실천하다 계엄군의 총탄에 희생되었습니다.
- 안장장소 :국립5·18민주묘지
- 묘역구분 :2묘역
- 묘역번호 :2-3
- 성 명 :박현숙
- 출생년도 :1962-07-27
- 사망일자 :1980-05-20
- 이장일자 :1997-05-05
- 직 업 :고등학생(송원여상 3학년)
- 사망장소 :지원동
- 사망원인 :총상(두부, 흉부, 하복부 전신총상)
- 내 용 :-마지막 남은 한 구의 시신
공부보다는 돈을 벌어야 한다고 박현숙 씨는 생각했다. 그러나 어머니의 반대로 그녀는 송원여상에 가게 됐다. 그래서 그녀는 동생들과 함께 넷이서 광주 동신전문대 앞에서 자취하고 있었다. 그러던 1980년 5월 23일, 박현숙 씨는 시신을 담을 관을 구하기 위해 화순으로 가는 소형버스를 탔다. 남동생 박대우 씨와 함께 버스를 탔으나, 함께 버스에 탄 시민군을 보고 자꾸 무섭다고 칭얼거리는 바람에 서방쯤에서 박대우 씨만 먼저 내렸다. 박현숙 씨는 동생을 따라 내리고 싶었지만, 대학생처럼 보이기만 해도 무조건 총을 쏘는 계엄군에게 봉변을 당할까 걱정한 사람들 때문에 내리지 못하고 그대로 화순으로 향했다. 버스가 주남마을을 지날 때 요란스러운 총소리와 함께 운전수가 쓰러졌고, 버스는 도랑으로 빠졌다. 차 안으로 총을 바짝 치켜든 군인들이 몰려와 마구 총을 갈겼고 박현숙 씨는 일곱 발의 총알에 맞아 죽고 말았다.
가족들은 박현숙 씨를 애타게 찾았지만, 어디에서도 박현숙 씨를 찾지 못했다. 망월동에 스물다섯으로 추정되는 아가씨의 시신이 한 구 남아있단 소식을 들었을 때도, 어머니 구길성 씨는 그건 절대 박현숙 씨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구길성 씨의 바람과는 달리, 그것은 박현숙 씨였다. 셋째 딸과 박현숙 씨의 학교 짝꿍이 사진 속 시체의 모습을 살펴본 결과, 박현숙 씨가 맞았다. 두 달 넘게 가족을 기다리던 박현숙 씨는 가족들이 그녀를 찾기 직전에 망월동 제 3묘역에 안치됐다가, 후에 신묘역으로 이장됐다. (증언자 : 구길성)
"증언자의 증언을 토대로 요약한 내용입니다. 실제 사건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도서 : "그해 오월 나는 살고 싶었다", 5·18민주유공자유족회 구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