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학

[2-34] 문재학

우리의 마음에 눈물을 주고 너의 가슴엔 한을 남긴 이승의 못다 이룬 서러운 인연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다시 만나리.

  • 안장장소 :국립5·18민주묘지
  • 묘역구분 :2묘역
  • 묘역번호 :2-34
  • 성      명 :문재학
  • 출생년도 :1964-06-05
  • 사망일자 :1980-05-27
  • 이장일자 :1997-06-14
  • 직      업 :고등학생(광주상고 1학년)
  • 사망장소 :도청
  • 사망원인 :총상(좌복부 및 전좌경부 관통 총상, 하악골 분쇄 골절상)
  • 내      용 :
    -산이 되고 강이 되는 사무침
    정치권 뉴스를 보는 아버지를 보며 자란 문재학 씨는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었지만 정치와 사회정의에 관심을 보였다. 그랬기에 문재학 씨는 1980년 5월, 광주항쟁에 뛰어들었다. 부모님이 제발 나가지 말라고 당부했지만 문재학 씨는 23일부턴 아예 집을 나가 들어가지 않았다. 25일 도청까지 어머니가 찾아왔지만 문재학 씨는 시민수습대책위원으로 도청 안에서 사상자들을 돌보는 일이니 위험하지 않다고 말하며 돌아가지 않았다. 그러던 26일, 계엄군이 광주로 재진입한다는 소식이 들렸고 문재학 씨는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도청에 남기로 한 자신의 마지막 말을 전했다. 그리고 27일 새벽, 요란한 총소리와 함께 숨을 거뒀다. 이후 망월동에 가매장 됐다가 1997년 신묘역으로 이장됐다.
    1980년 6월 6일이 돼서야 아들의 행방을 찾은 부모님은 문재학 씨의 담임선생님과 함께 망월동으로 가 무덤을 파헤쳐, 문재학 씨의 죽음을 확인했다. 김길자 씨는 아들의 죽음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힘들어 하다가 유족회 활동을 시작했다. 여러 고초를 겪었지만, 폭도라는 오명을 쓴 문재학 씨를 위해, 광주의 억울한 죽음들을 호소했다. 그러나 정부가 바뀌고, 시간이 지나도 바뀌는 것은 없었다. 뭐든 달라질 줄 알았는데 돌아오는 건 허울뿐인 보상이었고, 김길자 씨에게 남은 건 가난과 마음의 상처뿐이다. (증언자 : 김길자)



    "증언자의 증언을 토대로 요약한 내용입니다. 실제 사건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도서 : "그해 오월 나는 살고 싶었다", 5·18민주유공자유족회 구술)

산이 되고 강이되는 사무침

추모글을 남겨주세요

5·18민주화운동의 숭고한 정신과 역사적 의의를 왜곡하려는 그 어떠한 글이나 정보는 예고없이 삭제하오니 이점 양지하시기 바라며,
경우에 따라서는 법적인 책임도 물을 수 있음을 고지하는 바입니다.

댓글등록
추모글은 100자 이내로 작성해 주세요.현재 0자 (최대 100자)
:
:
추모글 입력

: 아래 새로고침을 클릭해 주세요. 새로고침

  • 여러분 읽으면 답글달아주세요. 너무 슬프죠. 답글 꼭 달아주세요.

    찬미 2017-05-25 09:25:34

  • 우리를 위해희생하신 문재학님 감사합니다.

    5.18 2017-05-25 09:24:58

  • 정말슬프네요 이런일이 일어나지않길

    스폰지밥 팬 2017-05-25 09:24:46

  • 문재학씨 하늘에서 저희를 보고계신가요? 문재학씨 덕분에 광주 100만 인구가 잘 살고 있습니다. 문재학씨 고맙고 사랑합니다!^^

    허재영 2017-05-25 09:24:34

  • 다친 사람들을 치료해 주려고 자기가 죽을 수도있는 데 늦게까지 치료를 하는게 대단하다.

    박화정 2017-05-25 09:24:31

  • 후손과 사상자들을 위해 이렇게 싸우다니...잊지 않겠습니다.

    이채원 2017-05-25 09:22:10

  • 너무 슬프고 5.18의 그 勇氣 본 받고 記憶하겠습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이찬형 2017-05-25 09:17:39

  • 저는 광양칠성초등학교에 다니는 6학년 2반 학생입니다. 저희가 지금 배우고 있는 역사중에 5.18 민주화운동이 나오더군요. 저희는 이 사건을 잊지 않겠습니다.

    정지훈 2016-07-17 15:13:44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