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잎처럼 지는 것을 슬퍼하진 마.
지금은 우리가 헤어져 있지만 좋은 세상
통일된 조국에서 다시 만나리…….
- 안장장소 :국립5·18민주묘지
- 묘역구분 :2묘역
- 묘역번호 :2-18
- 성 명 :방광범
- 출생년도 :1969-09-21
- 사망일자 :1980-05-24
- 이장일자 :1997-05-04
- 직 업 :중학생(전남중 1학년)
- 사망장소 :진월동(원제저수지)
- 사망원인 :총상(두부 관통 총상, 두개골 좌측이 떨어져 나감)
- 내 용 :-사람의 목숨이 개구리의 목숨인가
중학교에 입학한 지 3개월이 된 방광범 씨는 5월 24일, 친구들과 원제저수지에서 멱을 감고 있었다. 박광범 씨가 멱을 감던 시간, 근처를 지나던 선두 병력이 효덕초등학교 삼거리지점에서 시민군과 주민들을 발견하고 무차별 총격을 가했고, 뒤를 따라오던 11여단도 함께 총을 쏘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총성에 놀란 아이들은 급히 몸을 숙였으나, 맨 뒤에서 뛰어가던 박광범 씨는 미처 몸을 숙이지 못했다. 다가오는 여름에 신이나 물장구를 치던 방광범 씨에게 총알이 날아들었다. 총알은 방광범 씨의 머리를 정확히 관통했고, 방광범 씨는 즉사했다.
아이들이 방광범 씨의 죽음을 알렸고, 머리에 총을 맞았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아버지 방두형 씨는 기절하고 말았다. 그래서 마을 청년들이 방광범 씨의 시체를 방두형 씨에게 보이지 않고 야산에 매장했다. 소식만 듣고서도 기절했던 방두형 씨는, 그래도 아들 마지막 모습은 봐야 한다며 야산을 뒤져 방광범 씨의 시체를 찾았다. 방광범 씨는 죽은 지 열흘쯤 지나서야 망월동으로 이장됐다. 아버지는 아들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매일 술을 마셨고, 어머니는 그런 방두형 씨를 견디다 못해 이혼했다. 방두형 씨는 남은 가족들을 부양해야 했지만, 몸이 좋지 않아 걷는 것마저 힘들다. 혜택이희생자 직계 가족에만 주어지는 의료보험제도 때문에, 혹여 남은 자식들이 아플 때는 돈이 들어 걱정이다. 누구도 치유해 줄 수 없는 마음의 상처를 입은 방두형 씨는 폭도라는 오명을 쓴 아들의 죽음을 혼자 묵묵히 견디고 있다. (증언자 : 방두형)
"증언자의 증언을 토대로 요약한 내용입니다. 실제 사건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도서 : "그해 오월 나는 살고 싶었다", 5·18민주유공자유족회 구술)